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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동서남북 : 서촌에서 방향을 잃다 - no.89 (2014년 8월 1일)

윤진 2015. 4. 13.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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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 서촌에서 방향을 잃다


윤진

그림 이솔



몇 년 전 내가 다니는 회사엔 조직도에는 있지만 실체가 없는 팀이 하나 있었다. '신규사업 TF' 팀이다. 구성원은 임원 한 명. 그나마 기획팀장이 겸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일도 벌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회사는 막다른 길에 이른 듯 보였다. 나와 직장동료들은 자조적으로 말하곤 했다. "우리 회사에 미래는 없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이상'이 오감도를 쓴 것은 어쩌면, 그가 통인동에 살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지 모른다. 좁은 골목들을 따라 걷다보면 다다르는 막다른 길은 서촌의 특색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서촌'은 왜 서쪽 마을일까? 무엇에 대해 서쪽인 걸까?


조선시대 조정에서 영의정 다음으로 높은 관직은 좌의정과 우의정이었다. '좌'와 '우'의 기준은 물론, 왕이 바라보는 방향이었다. 그럼 좌의정과 우의정 중 누가 더 높을까? 그를 알기 위해선 방위를 따져봐야 한다. 왕은 남쪽을 바라본다. 왕의 왼쪽은 동쪽이 되고, 오른쪽은 서쪽이 된다. 세상은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어 형성되는데, 해가 떠오르는 동쪽은 양이 되고, 해가 지는 서쪽은 음이 된다. 조선시대에는 음보다 양을 더 높게 숭상했고, 그래서 우의정보다 좌의정이 높았다.


쏠 : 그런데 다 왕을 기준으로 한 것도 아니네.

윤 : 왜?

쏠 :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은 서촌이라 부르잖아.

윤 : 응.

쏠 : 그런데 '북촌' 한옥마을은 경복궁 동쪽에 있는데 왜 '동촌'이 아니지?

윤 : 그래. 그게 좀 이상하지.


조선시대에 사대문 안은 크게 세 마을로 나뉘었다. 그 구분 기준은 '왕'이 아니라 '청계천'이었다. 북쪽이 북촌, 남쪽이 남촌, 청계천 언저리가 중촌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경복궁 동쪽에 있는 재동, 계동, 가회동, 삼청동, 원서동 일대를 일컬어 '북촌'이라 부른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전부터 이와 구분해 경복궁 서쪽에 있는 통의동, 통인동, 누하동, 누상동, 옥인동, 청운효자동 일대를 '서촌'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좌와 우, 위와 아래, 동서남북... 방향이란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정해진다. 어딘가에 있는 원점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푸코의 진자가 좌우, 혹은 앞뒤로 끊임없이 진동하더라도 진자를 매단 줄의 끝점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중심이 되는 '원점' 말이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원점이란 게 있을까? 모든 방향은 상대적이다. 남산은 경복궁에서 보았을 때 남쪽에 있지만, 강남에서 보면 북쪽에 있는 '북산'이 된다. 좌의정과 우의정 역시 왕을 바라보는 사람을 기준으로 한다면 반대가 된다.


사람들의 관계는 한 사람만을 기준으로 정립되지 않는다. 홀로 만들어지는 관계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관계는 상대적이다. 자식이 태어나야 부모가 되고, 시민들이 있어야 시장이 있고, 팀원들이 있어야 팀장이 있다. 아들, 딸 없이 아버지, 어머니가 될 수 없고 시민 없이 시장이 있을 수 없다. 뭐, 우리 회사처럼 팀원 없는 팀장도 있다지만... 그러니 말하지 않던가. 우리 회사에 미래는 없다고.








* 주의할 점 : 그림을 가운데 그리지 말자